호탕했던 대인(大人) 성곡 김성곤 묘비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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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1월6일 국민대학 후정에서 성곡 김성곤 묘비 제막식이 열렸다(사진/연합 1975.11.6) 이 자리에 미망인 김미희와 상주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 등 유족과 친지들이 참석했다. 묘비와 신도비 비문을 이은상이 지었고, 서체는 김충현이 맡았다. 김성곤(1913~1975)은 동년 2월25일 뇌출혈로 62세에 작고했다. 김성곤의 묘는 1984년 강원도 평창에 이장되었고, 또 다시 2014년 고향인 대구 달성군 구지면으로 재 이장됐다. 김성곤이 국민대학에 처음 안장되었던 것은, 그가 신익희가 설립했던 국민대학(1946년)을 1959년에 인수해 키웠기 때문이다. 현재는 그의 손자 김지용이 2017년 1월부터 국민학원 국민대학교 이사장이 맡고 있다. 김성곤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건국, 박정희 개발독재시대를 살아왔던 '기성세대'로 ‘돈과 권력’ 부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애국정신, 계몽교육에 대한 열정, 인간적 매력으로 호평을 받는 인물이다. 대구 달성 출생으로 1929년 대구보통학교 4학년 때 교내 항일 운동 주동으로 퇴학을 당하여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전학했다. 1937년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1939년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하면서 사업의 길을 넓혀나갔다. 1948년 금성방직을 인수하고 1952년 동양통신을 창간하고 1953년 연합신문과 1956년 태평방직 아주방직을 각각 인수하는 등 사업을 성공적으로 확장시켜 나갔다. 한편 1958년부터 정계에 입문하여 제 4,6,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성곤은 박정희의 친위대로서 박정희의 3선 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를 제거하고 힘을 얻었다. 1971년 2월 김종필과 육사 8기 동기생 오치성 내무장관이 임명되었다. 이에 야당이 오치성 장관 해임건의안을 제기하자 김성곤은 이에 찬성하면서 오치성이 해임됐다. 이른바 1971년 10·2항명파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김성곤은 박정희로부터 호된 고문을 당했다는 설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김성곤은 공화당 당직과 공화당 탈당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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