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당 조만식 탄신 1백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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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 조만식 선생기념사업회 상임위원장 박재창(사진 중앙, 전 평남지사)이 고당의 장남인 연명(사진 좌측)과 함께 1983년 1월5일 대한적십자사를 방문하여 유창순 총재에게 조만식 선생의 생사여부 확인을 요청했다(사진/ 1983.1.5.) 1983년은 조만식(1883.2.1~1950.10.18.) 탄신 1백주년이 되는 해였다. 탄신 1백주년 기념식이 2월1일 열렸고 1984년 6월14일 서울 중구 저동에 고당기념관이 준공됐다. 모스크바 3상회의서 1945년 12월27일 한반도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확정 이전부터 신탁통치 조짐을 보이자 조만식은 이를 지지하지 않았고, 김일성의 북한 공산세력은 1946년 1월 5일 그를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시켰다. 6.25사변이 터진 1950년 공산군에 의해 10월18일 67세로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확인된 것이 없다. 한국 전쟁 발발 이전에 우리 측에서 조만식에게 월남을 권유하였지만 조만식은 북한에 남겨진 1천만 동포를 그냥 두고 혼자 갈 수 없다며 사양했다고 한다. 조만식은 부인과 두 번이나 사별하여 3번 결혼하게 되었고 5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1897년 15세에 2살 연상인 박씨 부인과 결혼했다. 첫 아들 칠숭이 출생했는데 정신박약아였다. 1902년에 박씨부인과 사별했다. 동년에 전주 이씨인 이의식과 재혼한 후에, 장남 칠승도 사망했다. 둘째 부인인 이의식과 사이에 4명의 자녀 선부, 연명, 선희, 연창을 두었다. 그러나 이의식과도 1936년 사별했다. 세 번째 부인 전선애와 1937년 결혼했다. 전선애와는 아들 연흥, 연수, 딸 선영을 두었다. 자녀는 아들로 칠숭(사망), 연명(1914.~1989. 두 번째 부인의 자, 고당의 첫째 아들 칠숭 죽음으로 사실상 장남), 연창(두 번째 부인과의 자), 연흥(세번째 부인과의 자), 연수(세 번째 부인과의 자), 딸은 선부(두 번째 부인과의 딸), 선희(두 번째 부인과의 딸), 선영(세 번째 부인과의 딸)을 둔 것이다. 한국전쟁이 나기 전에 부인 전선애(1904~2000.3.29)와 장남 연명, 3남 연흥, 4남 연수, 장녀 선부, 막내 선영이 월남했다. 조만식은 평안남도 강서군 박석면 반일리 내동에서 출생했다. 1883년 6세에 서당에서 한학하고, 1986년 한문수학을 마쳤다. 1905년 평양에서 22세에 개신교 학교인 숭실중학에 입학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일본 정칙영어학교, 일본 명치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3.1운동을 위해 오산학교장을 사임했다. 1919년 3.1운동으로 투옥도 되었고 YWCA 평양지회를 설립하고 항일단체인 신간회를 주도했다.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했고, 도산 안창호과 농촌진흥운동을 계획하기도 했다. 조만식은 ‘비폭력, 불족종 항쟁을 이끌어서,’한국의 간디‘라고도 한다. 한편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동시에 남한에는 미군정이, 북한에는 8월25일 소련군이 진주했다. 이어 1945년 10월14일 김일성도 북한으로 돌아왔다. 소련군은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 내 소련의 단독정부를 세우려고 했다. 조만식은 남북통일 국가 수립을 위해 북한 김일성과 척을 지며, 1945년 11월 반공산주의 인사들과 조선민주당을 결성하여 이끌었다. 김일성은 1946년 1월23일 조만식을 반동으로 규탄하면서 조선민주당을 접수하고, 조만식을 조선민주당에서 축출해버렸다. 1948년 5월이 되면서 남한과 북한의 각각 단독정부 수립이 거의 확실시 되면서 조만식은 부인 전선애와 자식들 대부분을 월남시켰다고 한다. 조만식 기념사업회는 1976년 결성되었고 매년 10월 추모식이 열린다. [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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