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한국 최초 자유시 ‘불놀이’ 시인 주요한, 언론·정치·경제계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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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자유시 ‘불놀이’를 발표한 주요한(1900~1979)이 1975년 당시 한국선주협회장으로 신년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 1975.1.12) 주요한이 19세에 발표한 시 ‘불놀이’는 한국 최초 자유시로 교과서에도 소개된다. ‘불놀이’는 프랑스 상징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산문적이며, 감각화 기법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런 연유로 일반적으로 주요한은 문인으로 알려졌는데, 실제 그는 다른 분야에서 더 일했다. 적극적으로 문학활동을 한 것은 20세 전후였고, 이후는 20대 중반부터 언론계, 30대 중반부터 기업에서 1960년대부터 정계와 경제계에서 활동했다. 주요한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그해 5월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합류해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됐고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임시정부가 내적 갈등을 겪을 때 그는 임시정부의 일을 모두 접고 1920년 9월 상하이 후장대학에서 공업화학과에 입학하여 1925년 6월 졸업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 1924년 12월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발간했다. 1925년 돌아와 동아일보에서 편집국장과 논설위원(1925~1932.11), 조선일보에서 1932년부터 1933년까지 편집국장, 논설위원, 전무를 했다. 이어 잡지부장(1933~1934.8)을 역임했다. 주요한은 1934년 주식회사 화신에서 취체역(이사)을 맡았다. 해방 이후 주요한은 1946년 대한무역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주요한은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고 민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1958년 5월 중구에서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0년 4.19혁명 후 5월에 미의원에 재선되었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 장관(1960), 상공부 장관(1961)을 했다. 5.16군사 구데타로 장면 정권이 무너지자 공직을 사퇴했다. 1963년 정치정화법에서 많은 정치인들이 해금되면서, 박순천과 장면 정일형 등은 민주당을 재건했는데, 이때 주요한은 참여하지 않았다. 야당에서는 주요한이 박정희 군사정권에 타협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 1964~1966년 경제과학심의회의 위원과 상임위원을 지냈고 1968년 11월부터 1976년까지 대한해운공사 사장, 1977년 대한해운공사 고문, 1971년~75년 대한선주협회장, 1973~78년 한국특허협회 회장,1975~79년 한국능률협회 회장, 1978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수석부회장을 지냈다. 주요한은 평양에서 1900년 12월5일 개신교 목사 주공삼의 장남(4남 4녀 형제 중)으로 출생했다. 1912년 평양 숭덕소학교 재학 중에, 도일하여 일본에서 1918년 메이지학원 중학교와 1919년 도쿄 제1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메이지학원에서 학우들과 문학 회람지를 발간하고 일본 시인 가와지 류코 아래서 근대시를 공부했다. 그의 나이 19세에 1919년 김동인, 전영택과 동인지 ‘창조’를 발간하고 여기에 ‘불놀이’를 발표했다. 한편 주요한이 친일 인사로 분류되기도 한다. 주요한은 일제 강점기에 그가 안창호(1878~1938)와 친분을 쌓으면서 안창호가 주도한 대한국민회와 흥사단에 가입하고, 1926년 결성된 수양동우회에 가입했다. 주요한은 여기서 이광수, 조병옥과 함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수양동우회는 농촌운동을 전개하고 부르조아적 사회 운동을 추진했다. 주요한은 1934년 6월 수양동우회 이사장이 됐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78∼465)에 따르면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1937.7 발발)을 위해, 조선 지식인과 부르조아 집단을 포섭하려고 수양동우회를 표적수사했다. 소위 수양동우회 사건이 난 것이다. 주요한은 1937년 6월 검거되었다. 1937년 8월에 서울에서 55명, 11월 평양에서 93명, 1938년 3월 황해도에서 33명 등 181명 동우회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거 체포됐다. 검거된 사람들은 강제로 전향되어 일제에 협력하게 됐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안창호는 고문후유증으로 병사했고, 홍난파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중 작곡가 홍난파, 장로교 목사 정인과, 의사 이용설, 이광수, 주요한은 극렬한 친일 행적을 보였다고 평가한다. 동우회는 1937년 해산됐다. 이 와중에 주요한은 1938년 11월 보석 출소하면서 전향했다. 이후로 주요한은 1940년 9월호 ‘조광’등에서 친일 글을 남겼고 1940년 10월에 국민훈련후원회의 일본어 보급운동에 참여, 12월 황도학회의 결성식에 발기인,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 준비위원 선출, 9월 조선임전보국단 경성지부 발기인이 되었다. 또한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미영 타도 대연설회, 1942년 5월 징병제도 연설회에서 각각 연설했다. 이런 행적으로 친일파로 분류되기도 한다[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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