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수주 변영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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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사에서 기인으로 꼽히는 수주 변영로(1897.5.9.~1961.3.14)가 5년간 앓던 인후암으로 종로구 신교동 자택서 64세 일기로 1961년 3월14일 타계했다. 사진은 변영로(중앙)가 코리아리퍼블릭(코리아헤럴드 전신)을 발행하던 대한공론사 사장 시절, 출장 중 사이공 공항에서 찍은 사진. 좌측 당시 서정억 전무, 우측 심재홍 주필. 변영로 영결식은 18일 오전 문총회관(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1947년 2월 결성, 1961년5.16으로 해산, 후신으로 예총 결성) 앞 광장에서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장례위원장은 오상순, 부위원장 이관구, 이희승, 이헌구가 맡았다. 수주의 유해는 부천군 오정면 고당리 선영에 묻혔다. 호방한 성격으로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던 변영로는 서울 맹현(현재 가회동)에서 선비 변정상과 진주 강씨 사이에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첫째 형은 국한학자로 법관을 지낸 변영만, 둘째 형은 영문학자며 국무총리를 지낸 변영태이다. 변영로는 첫째 부인 평창 이씨와 사별하고 양창희와 재혼했다. 변영로가 제2대 코리아헤럴드 사장으로 재직(1954.7~1961.2)할 때, 양창희와 낳은 아들 변문수가 자신도 모르게 코리아헤럴드 기자시험에 합격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변영로는 노발대발하며 당장 내보내라고 했으나, 정당하게 합격한 자를 불합격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회사 중론으로 아들 변문수는 ‘간신히’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변영로는 형제들과 같이 수재였다. 12세 때 중앙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 때 중퇴했다. 1913년 중앙기독청년회관 영어반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수료했다. 19세에 중앙기독교청년 회화 영어반 교사를 했고 21세에 중앙고보 영어교사를 했다. 이때 잡지‘ 청춘’에 영시 ‘Cosmos’를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 때, 21살의 변영로는 YWCA에서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해외에 발송하는 일을 했다. 이화여전 강사를 할 때, 1924년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을 발간했다. 일본 총독부는 이 시집이 불온하다며 일본 총독부가 압수했다. 자신의 글이 총독부에서 검열을 받고 첨삭을 당하자, 변영로는 분개하여 ‘굶어 죽을지언정 뼈 없는 글을 쓰지 않겠다’며 붓을 꺾기도 했다. 미국 캘리포니나 산호세 대학에 1931년 유학을 떠난 후, 귀국하여 1935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여성동아의 전신인 ‘신가정’ 주간을 했다. ‘신가정’ 표지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 게재하고 ‘조선의 다리’라는 제목을 붙여 총독부는 변영로를 강제 퇴사시켰다. 변영로는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1946~1955)할 때, 친구가 찾아오면 수업을 그만 두고, 술을 마시러 갔다고 한다. 변영로의 '술' 사랑은 익히 알려졌다. 아들 변문수에 따르면, 아버지 변영로는 자주 술에 취해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고 한다. 어느날 공초 오상순, 성재 이관구, 횡보 염상섭이 찾아오자 사동을 시켜서 동아일보 편집국장 송진우에게 후일 좋은 글을 기고한다면서 선금으로 50원을 받아 술을 사서 성대 뒷산 사발정(현재 옥류정) 약수터로 올라가 술을 마시고 만취상태에서 마침 비가 와서 옷이 졌자 모두 옷을 벗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인근에 묶여 있던 소를 타고 성대를 거쳐 동네에 내려오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그의 수필집 ‘명정(酩酊) 40년’에 도 나와 있다.(*명정이란 술에 몹씨 취한 상태를 이름) 변영로는 1955년 어느 일간 신문에다 ‘불혹(不惑)과 부동심(不動心)’ 칼럼을 썼다가 교수직에서 파직됐다. 칼럼에서 변영로는 ‘위대한 위선자인 공자의 불혹과 절세의 데마고가(선동가란 뜻)인 맹자의 부동심은 치둔, 열약한 우리 후생에게는 수행할 수 없는 과업이요, 극복할 수 없는 난행이며, 반등할 수 없는 도덕적 고봉이다‘라고 했다. 전국 유림들이 변영로를 성토했고, 유학정신이 건학이념인 성대는 변영로를 파면했다. 변영로는 195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고 195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펜클럽대회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변영로는 문학적 재능이 있었지만 작품은 몇 개 남기지 않았다. 그는 낭만성, 서정성과 민족정신을 드러내는 작품을 썼다. 시에서 어휘 선택의 세련됨, 상징과 기교의 재능을 보였다. 수필에서는 해학, 풍자, 기지가 번뜩이는 탁월함을 보였다. 시집 ‘조선의 마음’(1924) ‘수주신문선’(1959), 수필집 ‘명정40’(1953) ‘수주수상록’(1954) 이 있다. 이외 그는 영미문학을 소개하고 우리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공로도 남겼다. [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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