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비 내리는 오후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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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4월 16일 당시 공화당의장 김종필이 부인 박영옥과 함께 오후 2시께 진해에서 서울로 재건호 열차를 타고 귀경하고 있다(사진/ 1964.4.16.) 38세의 No2.실권자 김종필은 일반 신사복이 아닌 ‘인민군복’ 풍의 큰 포켓이 네 개나 달린 캐주얼 차림으로 멋을 냈다. 젊은 나이에 최고 권력의 가장 가까이 있는 그의 표정은 자신감과 여유가 넘친다. 35세의 부인 박영옥(1929~2015)은 지금 보아도 스타일리쉬하다. 심플한 디자인의 벨트가 달린 화이트 계열의 레인코드를 입고, 짙은 색의 스카프를 둘러 ‘흑백’의 세련미를 보이며, 프레임백을 들어 품위를 더했다. 귀경하는 이 부부의 모습은, 서로를 자랑스러워하며 비오는 날 애정 어린 낭만적인 데이트를 하는 듯하다. 사실 이런 여유와 달리 김종필은 진해에 가있는 박정희를 4월 14일 찾아간 것은 한일회담에 대한 학생들과 재야의 반대시위 관련 대책논의였다. 1952년 2월 15일부터 시작된 한일회담은 한일간 국교 조정을 위한 기본조약 체결, 일본거주 한국인의 법적 지위, 재산청구권, 문화재 반환, 어업 문제, 선박 문제 등을 논의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1952년 4월)전에 타결이 목표였지만 전후 14년이나 걸린 장기교섭이었다. 박정희는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미국의 원조 감소를 대비해, 경제개발의 재원조달이 필요했다. 미국도 동북아시아에서 공산권 방어를 위해, 일본의 아시아 평화 기여를 촉구하며, 한일회담 타결을 원했다. 1961년 11월에 박정희·이케다 회담을 시작으로,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이 만나서, 일본이 한국에 무상으로 3억 달러를 10년간 지불하며, 정부차관 2억 달러를 연리 3.5%, 7년 거치 20년 상환조건으로 제공하며 1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제공한다는 '김·오히라 메모'를 작성하여, 청구권 문제의 해결원칙에 합의를 보았다. 1963년 7월 외무장관 김용식과 오히라가 만나 어업문제의 조속해결에 합의했다. 그러나 1964년 1월부터 한일협상 반대를 주장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3월에 학생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와 탄압이 연일 보도되면서 여론이 악화됐다. 이에 대한 대책은 전국 학생 대표 122명을 초청하여 4.19기념식이 끝난 후 남원에 들러 김주열 묘에 참배하고 나주비료, 여수, 부산, 울산, 김천 영월 화력발전소 등 산업시찰을 시켜 정부활동을 홍보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대대적으로 6·3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벌였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반대자들을 탄압했다. 1965년 2월에는 기본조약, 4월에는 어업협정이 가조인되면서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8월 14일에 국회가 열려 공화당 단독으로 한일기본조약을 비준했다[헤럴드DB/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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