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성고문사건 피고 문귀동에 분노한 여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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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5월 17일 오전 9시 45분, 부천 성고문 사건 첫 공판이 인천지법에서 열렸다. 공판 후에 11시 40분 경 피의자 문귀동(당시 41세)이 교도소 구급차로 법원을 빠져나가려는데, 길목에 있던 방청객들 중에 여학생들이 문귀동이 탄 차량을 향해 분노로 고함치며 경계물로 쳐놓은 바리게이트를 넘어서려고 하자 교도관들이 이를 저지하며 실강이를 벌이고 있다(사진/ 1988.5.17.) 이 공판은 성고문 사건 발생 후 1년 11개월 만이었다. 인천지법 제103호 법정에는 서대협, 민가협회원, 방청객 1백여 명과 재야변호사 7~8명, 피해자인 권인숙이 참석했다. 이 공판장은 1986년 권인숙 본인이 실형을 선고받았던 그 법정이었다. 이날 열린 성 고문사건 공판에서 피고인에 대한 인정신문, 공소장 요지 낭독, 피고인의 모두 진술 등이 진행됐다. 문귀동은 성고문 관련 혐의에 대해 전면 부인하자 방청객들은 ‘뻔뻔스런 문귀동을 전기고문해라 ’ ‘성고문 은폐조작 관계기관 대책 회의 관련자 전원 구속하라’ 등을 외쳐 공판이 20여 차례 중단됐다. 문귀동은 1989년 6월에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파면됐다. 문귀동에게 사법 형벌이 내려지기까지 험난한 과정이 있었다. 1985년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권인숙은, 당시 군부독재의 압제에 있던 우리사회가 이를 타파하기 위해 벌이던 여러 민주화 운동 중 하나였던 '노동운동'에 가담하여 휴학하고 가명(허명숙)을 써서 부천시에 소재한 가스배출기 제조회사에 위장취업을 했다가 드러나, 1986년 6월4일 주민등록증 위조한 공문서 변조혐의로 부천경찰서로 연행됐다. 문귀동 경장은 6월 6일과 7일 권인숙을 조사하면서 5·3인천사태 관련자 행방을 물으며 성적고문을 가했다. 풀려난 권인숙은 수치심으로 자살까지 생각을 했지만 인권변호사 조영래·홍성우·이상수 등 도움으로 1986년 7월 3일 문귀동을 강체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공안당국은 권인숙을 공문서변조 및 동행사, 사문서 변조 등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문귀동도 명예훼손 혐의로 권인숙을 맞고소했다. 공안당국은 7월 16일 성고문은 날조라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런 부당한 수사결과에 맞서 여성 및 인권단체들은 7월19일 명동성당에서 규탄대회를 열고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검찰은 문귀동에 대하여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대한변호사협회는 8월25일에 재정신청을 청구했지만 서울고등법원은 10월31일 기각했다. 권인숙은 1986년 12월1일 인천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고, 재판이 계속됐다. 와중에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며서, 권인숙은 7월8일에 가석방되었다. 대법원은 1988년 2월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재수사가 추진된 것이었다[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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