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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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프랑스가 1886년 6월4일 조불우호통상조약을 맺었다. 그 이전에 양 국민의 접촉은 선교사들과 선원이었다.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 피에르 모방(Pierre Maubant)이 중국을 거쳐 1836년에 한국에 도착했다. 조선은 당시 1839년부터 천주교를 박해하여 1866년는 프랑스 선교사 9명, 한국인 천주교도 8천 여명을 처형했다. 프랑스해군은 보복조치로 강화도를 침범해왔다. 1866년 병인양요가 난 것이다. 이후 서양제국들이 조선과 조약을 맺고, 프랑스는 열강 중에는 마지막으로 1886년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사진은 당시 프랑스 공사관으로, 현재 정동 창덕여중자리에 소재했었다. 초대 공사였고, 제3대로 다시 부임한 빅토르 콜앵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의 재임 시 1896년 완공된 건물이었다(사진/1896). 규모는 1,372·㎡이며 탑옥(옥상에 돌출한 부분), 화강석 대석(지대를 둘른 돌), 창대(창호 밑틀을 받는 돌), 장식기둥, 아치장으로 만든 2층 벽돌 건물로 당시 외교공관 중 가장 화려한 서양식 건물이어서 서대문 방향에서도 눈에 띄었다고 한다. 현재 시각으로 보기에도 건물은 우아하며 매우 아름답다. 이 건물이 설립되기 이전에는 프랑스는 조선과 통상조약 후에, 처음에 종로구 관수동 126번지 수표교 부근 에 있었다. 주한 미국 공사 호레이스 알렌은 공사관이 허치슨(Mr.Hutchson) 주택에 설치되었다고 했다. 한편 당시 공사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던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은 프랑스에서 한국학의 아버지로 불린다고 한다. 이후 1905년 조선이 일본과 을사늑약을 맺고 1910년 경숙국치로 조선의 주권이 상실되면서 프랑스 외교관리들은 1910년 이 공사관을 떠나 서대문 밖 합동 30번지의 민영환의 건물을 매입하여 옮겨갔다. 사진의 공사관은 이후 총독부 산하 기관으로 사용되다가 1939년 서대문 심상소학교를 세우면서 헐렸다. 프랑스는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인연으로, 조선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1919년 4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결성되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1년간 대표단을 파리에서 맞았다고 한다. 광복 이후 1949년 주한 프랑스 대사관이 재개관 됐다.[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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