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의사 추모, 김구 한시(漢詩) 공개

TwitterCyworld
이전
다음

1994년 10월 10일 이봉창(1901.8.10~1932.10.10) 의사 순국 62주년이 맞아, 이봉창 의사를 추모하며 백범 김구가 썼던 한시가 이봉창 영정에 봉정됐다. 이 추모시는 백범이 이봉창 의거 17주년을 기념하여 1949년 1월 8일 쓴 것으로 45년 만에 공개됐다. 승려 박삼중이 김구(1876.8.29~1949.6.26)가 쓴 이 추모 한시를 고서상을 통해 입수한 후, 이봉창 의사 기념사업회와 협의를 하여 추모일에 공개했다(사진/ 연합. 1994.10.10.) “영욕에 놀라지 않고 한가히 뜨락에 피고 지는 꽃을 보며, 움직임과 머무름에 무심하고 하늘가에 걷히고 펼치는 구름 따라 흐르며, 맑은 창공 밝은 달 어느 곳인들 훨훨 날 수 없을까만 불나비는 유독 촛불에 투신한다. 맑은 물 고운 풀잎 무엇인들 마시고 쪼아 먹지 목하랴만, 수리는 유난히도 썩은 뒤를 즐긴다. 아아 세상에서 불나비와 수리 아닌 자 몇몇이나 되랴“ --이봉창 의사의 동경 사쿠라다문 의거를 기념하며, 김구..... 의사 이봉창은 일제 강점기인 1932년 1월8일, 도쿄도 지요다 구에 있는 사쿠라다 문에서 일본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했다. 히로히토가 연병장 관병식 참관 후 돌아가는 길이었다. 일왕은 다치지 않았으나 말이 다쳤고 궁내대신 마차가 뒤집어 졌다. 일본왕 히로히토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으로 조선인 독립운동의 강인한 저항성이 일본인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당시 힘이 빠져가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전선에 새 활력소가 됐다. 이봉창 의사는 그해 1932년 9월 30일 도쿄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32세로 교수형을 당했다. 이봉창은 효령대군 후손인 이진규의 둘째 아들로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출생했다. 일본인 제과점 종업원으로 주인으로부터 학대를 받고, 만주로 옮겨가서 남만철도회사서 운전 견습했는데 역시 조선인이라 수모를 겪었다. 이봉창은 항일운동 할 것을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6년간 일본에서며 점원, 철공소, 잡역부 등을 하면서 일본인 생활을 익혔다. 일어를 잘했고, 일본인을 양부로 두고, 기노시타 쇼죠라는 이름으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할 일 없는 한심한 건달처럼 보이게 했다. 이봉창은 만주로 가서 김구를 만났고 ‘거사’를 앞두고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의 집에서 일본인 국왕을 도륙한다고 태극기 앞에서 선서했다. 관련 기념사진이 남아있다. 광복 후, 백범은 이봉창 의사 유해를 받아서 1946년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의사 이봉창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포토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