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주부 김용환 시사만화가 귀국 풍속화전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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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50년대까지 국내 매체에 실렸던 시사만화 ‘코주부’의 작가 김용환(1912~1998)이 일본에서 잠시 귀국하여 1978년 10월 30일부터 11월4일까지 조선호텔화랑에서 풍속화전을 열었다. ‘장날’ ‘씨름판풍경’ ‘주막집풍경’ ‘콩서리’ ‘동네 잔치상’ ‘신랑달아먹기’ ‘상좌’ ‘취바리’ ‘먹중’ ‘샌님’ 등 55점이 전시됐다. 사진은 김용환(좌. 당시 67세)이 전시 작품 앞에서 그의 풍속화에 제자를 써 준 송지영(1916~1989, 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사진/ 1978.10.30.) 사실주의 만화 대가 김용환의 시사만화 한 컷짜리(카툰)은 ‘The Korean Republic(The Korea Herald 전신, 1953년 8월15일 창간)’에 창간 직후 8월21일부터 선보였고 9월9일부터는 3컷 짜리 ‘코주부’ 연재만화가 게재됐다. 캐랙터 ‘코주부’는 1942년에 일본에서 처음 등장했다. 김용환이 20세인 1930년에 그림을 공부하러 일본에 건너가 데이코쿠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재일교포를 상대로 발행됐던 ‘도쿄조선민보’의 4칸짜리 시사만화에 ‘큼지막한 코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캐랙터 코주부’를 등장시켰다. 그는 일본 ‘니혼쇼넨’ 잡지 전속 삽화작가와 고단샤 출판사의 작가로 활동하고 해방 전 한국에 돌아왔다. 코주부 만화 인기는 일본에서는 여전하여 1978년 당시도 일본에서 발행되는 ‘통일일보’에 게재 중이었다. 김용환은 1946년 단행본 만화의 효시였던 ‘토끼와 거북이’를 발간했고 1952년 ‘코주부 삼국지’를 월간지 ‘학원’에 연재하고 "박첨지" "똘똘이의 모험" 등 시사와 어린이 만화로 크게 인기를 모았다. 김용환은 6.25사변으로 ‘기구한 운명’을 맞기도 했다. 전쟁 발발 당시 김용환은 일본인 부인과 함께 명동 언덕바지에서 ‘금붕어’라는 다방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다방 정리로 시간이 지체되어 한강 대교가 폭파됐다.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북한군에게 잡혔다. 1945년 해방 후 미 군정에서 발간한 잡지 ‘자유의 벗’의 고정 필자로 활동했다고 인민군과 미술가동맹은 김용환을 ‘악질 반동’이라며 구명 대가로 이승만 대통령이 한반도를 다 내주고 ‘현해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포스터를 그리라 명령했다. 북한군은 이 포스터를 ‘이승만의 주구’였던 ‘코주부’가 전향을 했다며 곳곳에 뿌렸다. 이후 9.28 서울 수복으로 국군이 김용환을 잡아 부역했다며 ‘빨갱이’로 규정해서, 서대문형무소에 잠시 갇였다. 일간스포츠 장상용 기자가 연재한 ‘만화가 열전’ 중 '코주부' 김용환 화백 (2002년 11월 01일 게재)에 따르면 형무소 수감 중에 한 간수가 김용환에게 ‘춘화’를 그려주면 밥 한 그릇을 주겠다고 제안하여 배고픈 김용환은 극사실적인 ‘춘화’를 그렸다. 훗날 만화가 방학기가 김용환에게 일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무엇이냐고 “춘화도다. 내가 이처럼 혼을 넣고 절절하게 그린 그림은 없다”고 말했다. 한편 1951년에 김용환은 문하생으로 정운경 화백(중앙일보 ‘왈순아지매’ 시사만화가)을 두기도 했고 1955년에는 한국 최초로 설립된 대한만화가협회(현재의 한국만화가협회) 초대회장을 맡았다. 김용환이 이승만 정권 때 일본으로 간 것은 1959년 가을, 미 극동군 사령부의 초청에 의해서였다. 코리언리퍼부릭을 창간시킨 대통령 이승만도 ‘코주부’ 연재만화를 좋아해서 김용환의 일본행을 만류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용환은 도쿄의 유엔군 극동사령부 심리전과에 배속되어 유엔군 발행의 반공잡지 ‘자유의 벗’과 재일동포 민단계 교민신문인 통일일보에서 시사만평과 만화를 연재했다. 그는 1995년 미국으로 이민했다. 김용환은 부인과 1남 3녀를 남겨두고 1998년 11월 1일 오전11시30분 향년 86세로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별세했다[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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