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진실규명’ 외치며 명동성당서 투신, 조성만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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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5월 15일 조성만 학생(서울대 화학과 2년)이 명동성당 교육관 4층 옥상에서 ‘양심수 전원 석방하라‘ ’광주학살 진상 밝혀내라‘, ’남북올림픽 공동참여하자‘ 등 구호를 외치며 과도로 할복한 뒤 투신했다. 사진은 투신한 조성만 학생의 학생증과 주민증(사진/ 연합 1988.5) 당시 서강대 학보사 학생사진 기자가 제보하여 언론매체에 게재된 투신 관련 사진에 흰옷 입은 조성만 학생이 투신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담겼다. 하늘에서 순결한 꽃잎이 떨어지는 것 같다. 생명이 사라지는 고결한 낙화의 찰라, 명동성당 교육관 벽에 그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새겨지고 있었다. 조성만 학생의 투신하는 그 시간 성당 입구에서는 5월12일부터 양심수의 전원석방과 수배해제를 요구하며 농성 중이던 구속자 가족과 시민 학생 등 3백 여명이 오후 2시부터 결의대회를 하고 있었고, 또 명동천주교회 청년단체연합회는‘광주항쟁계승5월제’행사로 달리기대회 출발을 앞두고‘전원석방’'수배해제’를 외치며 성당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8m 아래로 떨어진 조성만을 학생들이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했으나 과다출혈과 두개골 골절 등 치명상으로 조성만은 그날 저녁 7시30분 24세로 생을 마쳤다. 조성만의 투신 소식을 듣고 전주서 달려온 그의 부모는 병원에 도착하여, 조성만의 어머니는 실신했다. 조성만은 ’척박한 땅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유서에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아버님, 어머님 얼굴.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척박한 팔레스티나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조성만은 1964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했다. 대학 재수를 하면서 명동성당 청년연합회의 가톨릭민속연구회에서 활동했고 1984년 서울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했다. 병역을 마치고 복학하여 1987년 6월항쟁 때 10일 구류되었다. 조성만 죽음으로 서울대, 연대, 서강대 등 서울 시내 각 대학에 조성만의 유서와 사진 등이 대자보로 붙었고, 교내 분향소가 설치됐다. 서울지역 총학생연합 등 학생단체와 민통련 등 재야단체가‘고 조성만 군 민주국민장장례위원회(위원장 강희남 목사, 실무책임 이부영)’를 구성했다. 5월19일 명동성당에서 입관식을 마치고 장례식은 '통일열사 고 조성만 민주국민장’으로 종로구 신문로 서울고등학교 자리에서 9시에 열렸다. 12시 30분경에 서울시청 앞에서 2만5천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노제를 지내고 이어 서울대 앞, 조성만 모교인 전주 해성고, 전남도청 앞에서 각각 노제를 지내고 저녁에 망원동 5.18 묘역에 안치됐다. 그의 모교인 전주해성고에 1999년 8월 조성만 추모비가 건립됐고, 고인은 2001년 8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한편 조성만을 기억하는 가톨릭 동료, 그의 모교인 전주해성고와 서울대 동문들이,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한 조성만 열사의 뜻을 알리기 위해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조성만추모사업위원회를 결성하고 2018년 5월 15일 조성만이 사망한 지 30년 만에 처음으로 명동성당에서 추모미사를 열었다[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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