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오히라 메모’ 주연들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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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총리가 1979년 5월 한일의원연맹 제8차 총회 참석 차 일본을 방문하면서 일본 전 총리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우측)를 방문해 악수하고 있다(사진/ 외신연합 1979.5.22.) 김종필(1926~2018)은 다음날 23일 동경 힐튼호텔에서 가진 한일의원연맹 기자회견에서 오히라 전 수상을 언급, 그를 ‘특별한 인연’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오히라 전 수상이 한국에 관련해 말할 때 “아” “우”하는 말더듬을 이제 하지 않는 것은 한국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지게 된 까닭이다‘. 김종필과 오히라(1910~1980)는 1962년에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막후 협상을 했던 사이였다. 1961년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박정희정권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 끌어오던 ‘한일회담’과 연계지어 일본으로부터 자금도입을 추진했다. 일제가 강점기에 벌인 조선에서 수탈행위에 대해 이승만 정부 때부터 한국정부는 한일회담을 통해 배상청구를 논의했지만 9년간 끌면서 타결을 보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 때,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일본의 당시 오히라 외상과 1962년 11월12일 두 번째 회담을 열고 청구권 문제에 합의하여,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 총 8억 달러를 지원받기로 했다. 이들의 회담 결과를 요약해 적은 것이 '김종필-오히라 메모‘라 지칭되며, 이는 1965년 한일협정에 주요 역할을 했다. 한편 당시 한일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였던 배의환이 1991년 12월에 국내 한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김종필과 오히라가 최종 담판하는 자리에서 회담 내용을 작성하고 양자가 서명을 한 뒤 주고 받은 메모는 없다고 밝혔다. 당시 회담이 두 사람만의 대화로 진행하면서 한일회담 양측 대표들은 자세한 회담기록을 남기지 않는 대신 두 사람이 합의하는 내용을 서로 메모해 뒤에 공식기록으로 받아들이기로 양해했었다고 한다. 김종필-오히라 막후 협상 후에 정부는 1964년 3월 한일외교정상화 방침을 밝혔다. 이에 학생과 야당은 일본의 침략 사실 인정과 가해 사실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선행되지 않았고, 청구권문제, 어업문제, 문화재반환문제 등에서 한국이 지나친 양보를 했다며 반대 시위를 별여 격화되자 박정희는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휴교령을 내려 '6·3사태'가 초래됐다. 1964년 12월18일에 한일 양국은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관한 비준서를 교환하고 1965년 6월 22일에 한일기본조약 등 25개 협정을 정식 조인했다.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기초한 한일기본조약의 부속협정인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은 일제 강점하의 민간인 피해자 및 위안부에 대한 보상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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