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시대, '한영길 북한 납치 사건’ 과 그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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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8월 7일 오후,‘북한 포섭 납치 사건’의 당사자 한영길(당시 무역진흥공사 프랑스 주재원)이 딸 유경과 함께 귀국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한 비행기의 트랩을 내려오고 있다(사진/ 1979.8.7.) 당시 국내 매체들 보도에 따르면 한영길은 프랑스 현지에서 부인이 자살해서 어려움을 겪던 중 프랑스에 거주하던 선배에게 도움을 받았다가 북한과 연루된 그 선배로 인해 북한으로 가려다가 마음을 바꾸었고, 남부 프랑스 보육원에 맡겨있던 어린 딸도 찾아 귀국하게 되었다. 선배로 언급된 사람은 이유진(현재 80세). 이유진은 1939년 평양 출생으로 해방 직후 6세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왔다. 그는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프랑스로 유학 가서 파리 소르본느대학에서 1973년 심리학 박사를 받았다. 이유진이 프랑스 유학 중인 1967년 7월 우리 중앙정보부는 독일과 프랑스의 유학생과 교포 194명이 대남 적화활동을 한다는‘동백림사건’을 발표했다. 그때 이유진은 이에 항의해서 우리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유진을 곱게 보지 않았다. ‘동백림사건’은 후일 2006년 1월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재조사했고 그 결과 이 사건은 국가보안법과 형법이 무리하게 적용되어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이 확대 과장된 것이라고 발표됐다. ‘한영길 북한납치’사건은 20여 년이 지난 2000년 초 들어서면서 그 진실이 알려지게 됐다. 국내 매체들은 이유진과 인터뷰 혹 그의 책‘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2001년)’ ‘빠리 망명객 이유진의 삶과 꿈(2004년)’을 통해 당시 사건의 진실을 알렸다: 70년대 말 당시 한영길의 부인이 세느강 투신 자살한 사건이 나자, 중앙정보부는 한영길에게 ‘반공무원인 신분으로 무리’를 일으켜 나라망신 시킨다고 지나치게 한영길을 압박했다. 한영길은 이유진에게 한국에 돌아가면 자신은 죽는다며 정치망명을 할테니 도와달라고 했고 딸 유경을 프랑스 부부에게 맡기고 싶다고 해서 이유진 부인은 딸을 맡을 사람을 소개했다. 이유진은 한영길을 파리 경찰서에 데려다 주고 일주일 일정으로 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에서 한영길의 망명 의도를 알아채고 그를 찾아내어 조사하면서 ‘공작’을 벌였다. 한영길은 파리 한국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유진이 딸을 빼돌리고, 자신을 북한으로 빼돌리려고 했다’고 발표했다. 졸지에 이유진은 '한영길 북한납치’사건을 벌인 북한공작원이 되었고 아동유괴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1981년 이유진은 북한에 다녀왔다. 북한 방문 중 김일성대학의 한 교수가 그에게 사상교육을 하겠다고 해서 크게 다투었다고 알려졌다. 당시 극렬한 남북 대치 상황에서 이유진의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은 극우세력에게 규문의 빌미를 내 줄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후 이유진의 한국 입국은 불허되었다. 2001년 국정원은, 입국을 허용하여 이유진은 자서전 출판기념회에 참석차 한국에 잠시 들어왔다. 한편 ‘한영길 북한납치’사건의 한영길은 귀국 이후 자살 한 것으로 알려졌다. 60-70년대 북한 정치 권력자의 악날함이 극심했던 남북대치 상황에서, 이 사건은 우리 남한 정치 권력자도 안보 상황을 권력 유지 수단으로 악용해 유신체제를 작동시켰고 그로 인해 평범한 개인의 삶이 피폐해지고 파괴되었던 암울한 시대의 편린을 보여준다[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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