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윤봉길 의거에 수류탄 제공 ‘한국광복군 참모장’ 김홍일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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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독립군이 항일투쟁을 벌이는 중,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가 일본 무리를 향해 던진 수류탄을 제공했던 김홍일 장군(광복회 회장)이 노환으로 1980년 8월 8일 향년 82세 일기로 별세했다(사진/ 1980.8.8.) 김홍일은 1898년 9월 23일 평안북도 용천 출생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 하던 부친의 요청으로 1913년 만주 선양에 가서 중국계 소학교를 다녔고, 돌아와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황해도 경신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중 1918년 일본 경찰이 오산동문회가 항일단체라며 오산 출신 김홍일을 체포해 1주일간 고문하고 석방했다. 김홍일은 바로 상해로 망명했다. 중국에서 구국일보사 사장 중국인 황개민 도움을 받아 김홍일은 1920년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한국독립군에 들어가 무관학교 생도대장, 교관, 중대장, 대대장을 하고 1921년 독립의용군단 대장, 1923년 조선의용군 부사령관을 맡으면서 항일전투 공적을 세웠다. 김홍일은 1926년 장제석의 중국 국민혁명군에 들어갔다. 1932년 임시정부 김구의 요청에 응하여, 김홍일은 중국군 신분으로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거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에 사용될 수류탄을 제조해서 지원했다. 두 의사가 벌인 무장투쟁으로 항일독립 투쟁의 불꽃이 살아났다. 중국정부와 중국 국민들도 지원금을 보냈다. 윤봉길 의거 직후에 김구와 대일 투쟁을 하는 중국 장개석은 낙양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했다. 김홍일은 한인 특별반 학생들을 독립군 장교로 육성했고 이들은 한국광복군의 핵심 요원으로 활동했다. 김홍일은 1945년 6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이 되었고 만주 일대에 거류하는 한국인 보호와 송환을 도왔다. 김홍일은 중국 국방부·정치부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8월 귀국했다. 김홍일은 1948년 육군 준장으로 임명되었고 1950년 6월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6·25전쟁 직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서 적을 1주일간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육군 제1군단장으로 평택지구에서 포항 탈환작전에 전공을 세웠다. 김구와 라이벌이었던 이승만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홍일을 홀대했다, 1951년 10월 예편하여 주중 대사를 역임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는 5.16군사 쿠데타 후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고문과 군정 외무부장관을 지냈다. 그러나 1965년 김홍일은 한일협정을 반대하고 박정희와 결별하면서 1967년 정계로 들어갔다. 제7대 국회의원을 하고 1971년 신민당 당수가 되었으나 내분으로 1972년 9월 당수직을 사임했다. 박정희의 삼선개헌과 유신체제에 반대했다. 1977년부터 광복회 회장을 맡았다. 독립에 헌신했고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권력에 빌붙지 않아 홀대를 받았지만, 장군 김홍일은 바른 길을 향해 걸어간 대인이었다[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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