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본산 쿤사지역의 일원 한국계 문충일, 일제-분단-냉전역사 수레바퀴에 휘말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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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왕 쿤사(Khun Sa 1934~2007)가 태국·미얀마·라오스의 국경지대에 구축한 ‘마약왕국’ 쿤사 지역의 메수야 마을서 교사 활동을 했던 문충일(46세)이 가족과 함께 1994년 8월 12일 김포공항에 들어왔다. 문충일이 감격으로 손을 든 채, 부인 인순선(45), 아들 철(19), 딸 미령(13)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감사 기도를 하고 있다(사진/ 1994.8.12.) 이들은 6개월전인 1994년 2월에 쿤사 지역을 탈출하여 쿤사의 비밀요원 눈을 피해 태국에서 은닉해있다가, 유엔이 문충일 가족에게 유엔난민 허가서를 내주어서 한국대사관이 발급한 임시 여권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문충일이 살아온 세월은 일제 강점기. 해방과 분단, 냉전체제라는 한반도를 지나간 근·현대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개인의 삶이 깔려 시대적 상처가 깊숙하게 난 것을 보여준다. 문충일은 평북 용천에서 1938년 출생했다. 부친은 넉넉했고 서울 피어선 성경학교에 다녔다. 문충일이 3살 되던 해 1941년 부친은 일제 압박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이동했다. 광복을 맞았지만, 만주에는 중국 공산당 세력이 우세해지면서 '재산가'를 핍박했다. 부친은 가족상봉을 기약하고 서울로 떠났다. 형 두 명은 후환이 두려워, 중국의 팔로군에 자원입대했다. 중국 팔로군이 북한의 인민군으로 편입되면서, 만주에는 자신과 어머니만 남게 되었다. 문충일은 1956년 흑룡강성 조선중학교를 졸업하고 1957년에 고등중학교를 입학했지만 생활이 어려웠다. 모친은 '서울서 아버지를 찾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학교를 그만 둔 충일은 내몽고 자치주에 들어가 노동을 하면서 서울 밀항을 계획했는데 적발됐다. 중국공산당은 그에게 반혁명죄로 10년 옥살이를 시켰다. 1970년 출감되어도 평생 수용소에서 살아야 했다. 강제노역 중에 부인을 만나 36세에 결혼했다. 1979년 모택동이 죽자, 등소평의 개방정책으로 문충일은 사면 받고 수용소를 나왔다. 극동방송과 kbs방송을 들으며 문충일은 한 목사에게 서신을 쓰면서 다른 목사들과 알게 되었다. 문충일은 1989년 6월에 천안문 사태가 나자 시위에 가담도 했다. 중국 당국은 천안문 시위 관련 외국인과 연락을 했던 기독교인들 검거에 나서자, 문충일은 가족을 데리고 미얀마로 갔다. 밀입국자는 붙잡히면 10년 이상 징역살이를 해야하므로, 문충일은 생존을 위해 1989년 9월 쿤사가 지배하는 샨 주로 가서 중국인 행세를 했고, 중국인 학교 교사로 일했다. 그는 미얀마 북부지역의 아편 군벌과 마약공급 실태 등 정보를 많이 알게 됐다. 문충일이 한국선교사 등과 접촉한 것이 알려져, 쿤사측으로부터 문충일은 마약정보를 누설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문충일은 가족을 데리고 쿤사 지역을 탈출했다. KNCC등 개신교단체들은 문씨의 구명 탄원서를 정부에 제출하여 문충일 일가는 7월 8일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실의 난민판정을 받고 한국으로 오게 됐다. 문충일의 입국 후 8월25일 조선일보는 문충일의 맏형 문상봉이 전주시 완산구에 살고 있다고 보도했다. 상봉은(1994년 70세)은 북한의 대남사업에 남파공작원을 실어 나르는 선박선원으로 일하다 1959년 선박이 발각되어 검거되었고 28년을 복역하고 1987년에 출소했다. 둘째형 희봉은 아버지가 월남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노역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문충일은 이후 기독교 선교에 투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헤럴드 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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