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 당권 투쟁 내홍 중 거대한 쓰나미 ‘10월 유신’ 급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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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9월 26일 유진산이 신민당 총재로 선출됐다. 환호하는 대의원들을 향해 유진산이 손을 들고 답례하고 있다(사진/ 1972.9.26) 당시 서울시민회관에서 (현 세종문화회관 자리/1972.12.5.화재로 소실) 유진산 측 대의원 445명이 참석해 열린 전당대회에서 새 당수로 선출된 것. 당시 신민당 대의원은 총 874명으로 참석 대의원은 과반 438명을 넘었다. 불참한 반 유진산계는 김대중을 주측으로 하는 김홍일, 양일동 등으로 9월 27일 효창동 김홍일 집에서 별도의 전당대회를 열었다. 반진산계는 진산계의 전당대회는 불법이라면서 12월 중에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당권체제를 개편하기로 했다. 또한 기존 당수였던 김홍일은 유진산을 상대로 9월 27일 ‘정당대표 위원 직무집행 정지 및 직무대행자선 가처분 신청‘을 냈고 또 유진산을 당비 횡령혐의와 당직인 불법사용 혐의로 고발했다. 당시 신민당은 당권을 둘러싼 계파갈등이 심화되어 내홍을 겪고 있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후에 정권을 잡은 박정희와 민주공화당을 상대로, 야당인 민주국민당, 민주당, 신민당, 민정당, 국민의 당, 자유민주당, 민중당, 신한당 등이 1967년 2월 통합되어 신민당을 출범시켰다. 출범 이후 1967년과 1971년 대통령 선거와 제7~10대 총선을 치렀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이 패배하여, 유진오가 총재가 맡았다가 1969년 9월 유진오가 총재를 사퇴하면서 1970년 1월 유진산이 총재가 됐다. 1971년 4월 대선을 앞두고 ‘40대 기수로’이 대두되면서 1970년 9월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그러나 제7대 대선에서 김대중은 45.2%를 득표하여 박정희(53.2% 득표)에게 패배했다. 대권에 계속 실패하면서 신민당은 김영삼을 밀고 있는 진산계와 반진산계로 양분됐다. 야권은 자체 당권 투쟁에 몰입되어 박정희 행보에 방심했고, 그의 장기집권 플랜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박정희는 기습적으로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에 특별선언(10월 유신)을 했다. 국회해산과 정당 정치활동 중지 등이 선포됐다. 거대한 쓰나미 ‘10월 유신’ 앞에 야권의 당권 투쟁은 조족지혈이 됐다. 김홍일은 유진산을 상대로 낸 ‘정당대표 위원 직무집행 정지 및 직무대행자선 가처분 신청‘을 동년 11월 6일 취하했고, 12월 26일 김인규 부장검사는 유진산의 당비 횡령혐의와 정재갑의 당직인 불법사용 혐의에 대해 혐의가 없다고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더욱 견고해진 박정희 독재정권 앞에 야권은 민주화 투쟁의 장도를 걷게됐다[헤럴드DB/ 우재복 기자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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