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 해방정국 반공 주민들· '동키부대' 의 사수 이어 우리군 철통방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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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0월 1일 국군의 날. 백령도 해상에서 함상훈련과 기동훈련이 실시됐다. 서해 옹진군의 백령도 30~40m 높이의 해안 절벽 바위에서 우리군이 훈련 중 국토방위의 경계를 펴고 있다(사진/ 1980.10.1) 백령도 해안은 약 4km에 걸쳐 사암과 규암으로 층리가 잘 발달된 깍아지른 듯한 절벽 비경이 펼쳐져 있어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린다. 백령도는 북한 황해도 장산곶과는 18km, 월래도와는 11km 거리에 있는 서해 최전방 중의 전방, 백령도가 남한령으로 사수된 것은 백령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반공유격대[후일 동키부대(백호부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세계2차대전이 끝나고 해방 후, 1945년 9월 2일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면서 백령면을 제외한 장연군 전 지역이 소련 군정 관할에 들어갔다. 황해도 장연군은 일찍이 기독교가 들어온 곳이었다. 평북 의주에서 살던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19세기 말 장연군으로 들어와 장연군에는 교회 39곳, 교인 3,200명에 이르렀다. 카톨릭 신자도 5~600명일 정도였다. 기독교인 주민들은 공산 괴뢰정권에 저항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기 전에 기독교인을 포함 반공주의 주민들은 당시 KLO(Korea Liaison Office/ 1949년 6월 1일 조직된 맥아더의 한국연락사무소. 대북 첩보부대, 대북 정보수집 심리전 테러 유격작전 수행)의 지원을 받으며 반공 무장 활동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고 1951년 1월 1·4후퇴 때, 장연군 주민들 다수가 백령도로 피난해 들어왔다. 기독교인이 다수인 이들은 북한 공산괴뢰 정권의 공격에 대비하여 자체 훈련을 하고 있었다. 미군은 이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고 청년 1,000여명으로 정비하여 1951년 2,3월 경에 미8군 산하 비정규전 유격·첩보 부대로 재편시켰다. 이들에게 지급해준 무전기가 당나귀 같다하여 일명 동키부대라고도 했다. 백호부대는 압록강 하구, 한강 하구 등 서해 30여 개 도서 전체와 구월산, 멸악산 등 황해도 내륙까지 서해안 전역에 걸쳐 활동했다. 1951년 1월부터 1953년 7월까지 37회에 걸쳐 적사살 2,110명 생포 105명, 반공인사 구출 4500여명, 3000여 점 무기를 노획하는 큰 공적을 세웠다. 이들은 김일성 인민국 총사령관에게도 위협적이어서 김일성은 유격대의 서해안 기습작전을 막으려고 ‘도서해방 전투명령’을 5번 내리면서 경계했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이 6·25전쟁 종식으로 한반도 정책을 결정하면서, 휴전협정을 구체화하던 1953년 6월 12일, 서해 38도선 이북 도서의 모든 공작원을 본대로 복귀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유격대원들은 38도 이남으로 이송됐다. 휴전 협정안에는 휴전 조인 5일 이내에 서해 5도를 제외한 황해, 경기도계의 서북해안 도서로부터 유격대 전원을 철수한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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